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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고려거란전쟁 문관 출신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by 혀뇌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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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주대첩의 개요


제3차 고려거란전쟁 중인 1019년 2월 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2. 귀주 대첩의 배경


* 전쟁의 배경은 1011년 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몽진의 시간을 벌고자 거란 성종에게

거란까지 찾아가 친조하겠다고 약속했다.
1012년 고려 현종이 친조의 약속이 지키지 않자, 거란 성종은 강동 6주를 대신 내놓으라고 요구.
1013~1017년, 거란이 7차례나 국지전을 벌이고, 동여진 해적들이 노략질해 고려의 피해가 수만명에 달했다.

* 거란군의 남하
1018년 12월 초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공 시작.
1018년 대장군 강민첨이 12,000여명의 기병으로 삼교천에서 거란군을 크게패배시킴(삼교천 전투)

* 개경의 지킨 현종
1018년 고려 현종이 태조의 관을 부아산 향림사로 옮겨 안치한 후,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주변일대에 청야 전술을 펼침
1019년 서북면 강감찬 본대에선 김종현이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 동북면에서 병사 3300이 개경으로 남하시작.
1019년 거란군이 신은현 평야에 진을 폈다. 그 다음 날 거란군이 아율호덕을 보내 거짓으로 철군하겠따고 알리며 300기의 군사를 금교역의 협곡에 숨겨, 개경의 경계가 완화되면 성에 잠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려는 이에 속지 않고 야간 이들을 역으로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소배압은 신속히 철수를 결정한다.


* 거란군의 북상(퇴각)
1019년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며 남쪽의 연주, 북쪽의 위주에서 원수 강민첨 대장군 기병대에 유격당하여 500여급이 죽었다.
해안길 방면을 강감찬이 틀어막았기에 소배압은 내륙길을 택했고, 강감찬은 내륙길의 마지막 관문인 귀주성 앞 평원에서 거란군을 막아섰다.

3. 귀주 대첩의 전개


* 양 군 모두 배수진을 친 대회전
1019년 2월 두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군대가 마주 되었고,
양측 모두 구릉을 내려와 하천을 하나씩 건너, 귀주성 앞 동쪾 평원에서 둘 다 배수진을 치소, 대회전을 하게 되었다.

*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
양측은 승패가 나지 않으며 전투가 장시간 이어졌다. 남하했던 김종현의 기병대가 돌아왔다. 기병대가 나타난 순간 바람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소나기가 찾아왔다.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몰아 붙이자, 거란군은 하천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 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거란의 황제 직속 최저예인 천운군,우피실군 중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거란의 지휘관급 아과달,작고,고청명,해리 등이 죽었다.
거란군은 석천 너머의 벌판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고, 소배압조차 갑옷,투구, 병장기, 말을 모두 버리며 도망치려 했다. 강민첨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1만 이상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전투가 끝나자 살아 돌아간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하다.

4. 귀주대첩의 결과


* 양국의 전후 처리
현종은 기뻐서 임시 누각을 짓고 승전군을 맞이하여, 강감찬의 손을 잡고 황금꽃을 주고, 9000여명을 포상했다.
거란 성종은 분노하여 소배압의 얼굴 가족을 뜯어내고 죽이겠다고 했으나 파직에 그쳤고, 공이 있는 장수들을 포상했다.

* 양국의 관계 복구

고려는 거란에게 예전처럼 번국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며, 억류했던 야율행평을 돌려보냈다. 즉, 조공-책봉관계의 복구를 요청 하였다.

고려의 요청을 받은 거란은 이를 허락했다. 이는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의 원인으로 삼던 '고려왕의 친조','강동 6주 반환' 같은 무리한 요구들을 다시 강요하지도 않았다.

* 주변국들의 교류증가

고려가 동해상의 동여진족 해적들도 소탕하거나 외교적으로 처리하자, 우산국, 탐라국,일본,주민들이 평안하게 되어, 고려와 교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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