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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 현종

by 혀뇌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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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은 고려시대의 제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009년부터 1031년 총 22년이었습니다.
그는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경종의 왕비인 헌정황후의 아들로서 제7대 목종에 이어서 즉위를 하였습니다.

 

고려 현종은 유년기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며 큰 시련을 겪어야 했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현종은 왕위계승에 있어 우선순위에 있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고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야 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며, 갑작스럽게 즉위하였습니다.
이후 거란의 두 차례 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속에서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는 등 큰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는데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황금기 접어들었으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습니다.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왕조의 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과 목숨을 건 몽진

 

 

거란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하여 온 것이다. 침공의 명분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을 묻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북송과의 통교를 저지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침공의 받아야만 했다.
2차 침입때는 거란이 무려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실권자였던 강조가 30만의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했고,
초반에 강조의 고려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통주 대전에서 대패한 강조는 그대로 거란군에게 붙잡혔다가 이후 처형당했고, 30만 고려군들 또한 전사만 무려 3만 명이나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완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결국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처음으로 외적들에게 함락되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됩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거란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복이 아닌 항전의 뜻을 굳힌 현종은 몽진을 결정했습니다.

 

 

2차 거란침입 이후 험난한 몽진과정



현종의 몽진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넘어 신변 위협도 받기도 했었습니다. 현종의 몽진은 이처럼 고난에 고난을 거듭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쳤고, 온갖 반란에 휘말리고 고초를 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도중에 도와준 사람이 나주 백성들과 공주 절도사인 김은부 딱 1명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딸 3명 모두 왕비로 삼았습니다.

 

 

거란의 2차 침공은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 속에서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 인한 엄청난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겠다 하여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고려 역사상 건국 히루 최초로 수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 고려는 점차 피해를 수습함에 따라 힘을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현종은 진정한 고려의 군주로서 본격적으로 통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차 거란 침입과 귀주대첩 그 후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북송과 비밀리에 외교 하였으며, 특히 1015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소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 고려는 북송의 지원 없이 거란의 재침공에 혼자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후에 1018년 소배압이 황실 최정예 기병으로 이루어진 10만의 대군을 앞세워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심을 어루만지고 왕권을 튼튼히 하면서 현종과 강감찬을 필두로 한 고려군이 거란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습니다.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려군의 총지휘관 강감찬은 배치해 둔 별동대를 계속 보내 거란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찔러대기 시작하였고, 내구산 전투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을 격파했고,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격파 하였습니다.
소배압은 2차 거란 침입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 근처 신은현까지 도착했고, 그러나 고려는 보강된 성문과 성벽,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었습니다. 고려군이 결사항전을 하니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고, 거란군 최악의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소배압은 개경의 방비를 소홀하게 한 뒤 척후병르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었습니다.
이미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잠입시틴 척후병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니 않은 금교역에서 고려군 붙잡혀 죽었습니다.
소배압의 군대는 북방세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보급선마저 단절된 상태인데 개경의 방비 또한 철통 같았으니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위험을 감지하여 결국 퇴각을 결정합니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 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종은 금교역 전투에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 전술적 승리를 거둔 끝에 적들의 사기를 꺾었고, 결과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의 귀주대첩은 이미 이긴 전쟁에서 적들을 몰살시켜 앞으로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버린 포위섬멸전이었습니다.
당대 최강의 기병 군단을 보유한 거란군을 상대로 벌인 대회전이었습니다.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인 선택을 하였으나 귀주에서 고려의 주력군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가 귀주 대첩이었습니다. 귀주 대첩은 고려군의 대승리를 이끈 명장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현종이 직접 나아가 맞이했다.
고려는 승리의 기쁨을 누린 후 1년여간 3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현종이 거란에 사신을 보냈으며, 거란에 형식적으로 사대의 제스처를 취했던 것은 기나긴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 위한 평화주의적 실리 외교로 평가됩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피해 복구를 노력하였는데 거란의 침공으로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어서 곤궁해지나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면서 전후 피해 복구에도 큰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행보



 

 

동북아시아 질서의 재편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에서 당대 최강 거란을 꺾은 강대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는데, 여러 나라들의 조공을 받았으며, 동아시아 세계의 균형자로 거듭났습니다. 국제 질서의 한 축으로 주요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후 거란과의 관계 복구 하였으며, 이는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전쟁 승리를 바탕으로 높아진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반영되어 실질적으로 고려는 거란과 송을 등거리에 두는 외교관계를 추진했다. 국익에 손해가 예상되는 거란의 요구는 고려가 당당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수도 개경 재정비 및 제2수도 서경 우대

 

고려는 조성도감을 설치하여 현종 재위 20년째인 거대한 나성을 쌓아 올렸으며, 훗날 개성현 백작이 되는 참지정사 왕가도가 대공사를 직접 담당했고 장장 21년 동안 공역이 이어졌습니다.
새로운 나성은 기존 나성과 다르게 개경 대부분의 범위 감쌌으며, 이는 수도의 방어력이 증강시켰습니다.
수도 개경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도 서경 장락궁에도 황성을 쌓아 개경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천자의 도성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서경을 제2수도로 우대하는 정책 기조를 이어나갔습니다.

 

현화사와 홍경사 건립

 

현종은 1017년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현화사를 세워 본인을 낳아 힘들게 살다 죽은 부모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었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원정왕후의 영정을 모셨다.
이 사찰은 현종이 지은 절인만큼 고려왕실이 중시하는 절 중 하나가 되어 불교 대사찰로서 한국 불교사에 이름 남았으며, 역대 군주들은 자신이 밀어주는 승려를 헌화사의 주지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고종 대에는 안종, 현종, 강종 세 임금의 영정을 보관했습니다.
현화사 말고도 안종 한 사람만을 위한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 이 절이 왕립사찰 '봉선홍경사'입니다.
'천안 봉선홍경사 길가비'가 남아있어 홍경사의 기원을 알 수 있으며,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서북면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이 주도하여지었으며, 절은 약 200여 칸으로 안에 약 80여 칸 크기의 휴게소가 있어 이름을 '광연통화원'이라 했다고 한다.
천안 홍경사에도 헌화사비처럼 봉선 홍경사 길가비가 남아있었다. 봉선 길가비의 내용을 보면 현화시비처럼 현종과 해동공자 최충, 당대 명필인 백현례를 비롯한 고려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현종은 5세 때 돌아가신 아버지 안종을 항상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국가제도 정비

 

거란과의 전쟁 이후, 현종은 드디어 지방세력을 정리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국가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합니다.
고려는 광종과 성종이 중앙집권의 토대를 다진 이래 현종과 문종의 치세를 맞아 완전한 통일제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겪었던 위기와 고난을 바탕으로 구제법을 했으며,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는데 이후 문종 대에 사형수 삼삼제로 이어집니다.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향리정원제, 향리공복제, 주현공거법 등을 실시하여 지방 세력 규제 및 중앙집권 강화책을 진척시켰으며, 이외에도 감목양마법, 나성축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전쟁에 대비함으로써 평화의 시대를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현종은 능력 있는 신하들을 계속해서 기용하였고 채찍과 당근 병행 했습니다.

1031년 현종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태자(덕종)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려의 대부분 백성들도 상복을 입거나 공무를 중지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합니다.
시호를 원문, 묘호를 현종이라 하였으며, 송악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 지내고 능호를 선릉으로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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