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혀뇌입니다.
오늘은 고려 제7대 왕 목종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목종은 재위 기간은 997년부터 1009년까지 약 12년간 재위를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제5대와 경종과 헌 애왕후 황보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제6대 왕 성종이 승하하자, 997년 17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목종은 초기에는 정사를 돌봤는데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섭정을 맡았다는 기록을 통해 목종이 이룬 업적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천추태후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강조의 정변을 보면 헌애왕후는 종교정책을 제외하면 그냥 아들을 좀 도운 수준일 뿐 실권은 목종이 다 쥐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목종의 업적이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욕적인 종교 관련 정책과 친인척들을 통해 목종의 즉위를 돕는 등 헌애왕후도 아들에게 꽤 도움을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 서경 우대
목종은 서경과 인연 깊었는데 본래 선왕 성종의 '계량군'이라는 봉호를 서경에서 이어받았고 다시 말해서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 장소가 서경 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서경을 호경으로 개칭하는 한편 서경의 관부도 유수관에서 태조 때의 낭관으로 환원시켰으며, 자주 행차하여 제사까지 지냈다. 뿐만 아니라 서경에 대한 조세 감면과 사면 조치도 여러 번 내렸고, 서경의 관리들과 군인들을 진급시키거나 포상했으며, 서경 안의 노인들과 과부들에게 물건이나 명예직을 내리는 등 후하게 대접했다.
2. 국가 체계 관련
왕의 모친 헌애왕후 황보 씨(천추태후)를 왕태후로 승격시키고 응천계성정적왕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국왕인 자신의 생일을 장녕절로 명명했고, 선왕과 선후들의 휘호를 덧붙였으며, 해당 관청에 선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법식을 확정 지었다.
과거법을 정비해 확정 지었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직책과 지방관들을 심사하여 정리했으며, 3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훈호를 내리고, 9품 이상으로 벼슬한 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정된 관복을 착용하게 했다.
3. 인재 등용
성종의 붕어로 인해 진사가 되었음에도 등용이 지체되었던 사람들을 급제시켰다. 그리고 매해 꾸준히 인재를 등용하여 1006년에는 6품 이상의 문관들에게 유능한 사람들을 각각 1명씩 추천하게 하여 사실 여부에 따라 추천자에게 상벌을 내리는 조치를 공표했다.
4. 불교 정책
승려들의 계급을 올려주었고, 개경 남쪽에 진관사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몇 년후에는 그 절에 9층탑을 쌓았다.
또한 숭교사를 창건해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1006년에는 선종과 교종의 승려로서 고승들에게는 법호를 덧붙여주었고, 환갑을 넘은 승려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승직을 올려 주었다.
5. 외교정책
거란에 사신을 보내 왕위를 계승한 사실을 알렸고, 거란에서도 수 차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작위를 높이는 등 원만한 관계 유지, 북송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북송과 거란 양국 사이에 무난한 외교를 전개했다.
6. 국방 정책
전시과를 개정하고 덕주, 평로진, 등주, 귀성, 용진진, 흥화진, 익령, 울진현, 통주 등 많은 곳에 성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1003년에는 새로 쌓은 덕주성을 포함하여 가주, 위화, 광화의 성들을 보수했다. 새로 쌓은 많은 성들이 훗날 거란전쟁에서 주요 전장이 된 것을 고려하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또한 많은 공사들로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6위의 부대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하는 등 사기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동여진의 침공에도 장수를 보내 대응했다.
군역을 개편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상적인 모든 남자에게 군역의 의무를 부과되는 병제를 완성했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징병제가 완성된 것이다.
7. 민생정책
국내의 산천의 신령들에게 모두 훈호를 붙었다. 불교가 도입된 지 오래되었으나 토착 신앙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추측된다.
1006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경주 사람 융대가 보낸 노비들을 사실 양민인 줄 알면서도 받은 평장사 한인경과 이부시랑 김낙을 유배 보내고, 마찬가지로 노비를 받은 궁인 김 씨에게는 구리 100근으로 벌금을 내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경하했다.
8. 폐위와 비극적인 최후
괜찮은 군주의 무난한 행보를 보이다가 그러나 정치를 잘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섭정을 맡은 그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초래했으며, 대부분의 섭정자는 임금이 성년이 되면 섭정을 거두지만 헌애왕후는 목종이 섭정이 필요 없는 나이임에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장악했다.
헌애왕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급기야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까지 꾸미며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대량원군까지 제거하려고 했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을 불러들여 확실히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계획을 세우고, 이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일단 김치양을 제거했지만 우발적이건 계획적이건 도리어 강조에게 뒤통수를 당해 폐위를 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헌애왕후와 함께 충주로 내려가던 도중 적성현에서 강조의 명령으로 김광보, 안패 등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고 만다.
목종은 고려사에서 첫 번째로 시해당한 왕이다. 그를 시해한 강조는 죽은 군주의 묘호를 민종, 시호를 선령대왕이라 했다. 이어 능호를 공릉이라 짓고, 자기 맘대로 태묘 올렸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현종이 고쳐 올린 묘호는 목종, 시호는 선양대왕이었다. 강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즉위하게 된 현종의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시호가 계속 추봉 되어 공식 존호는 목종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 능호는 의자를 써서 의릉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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