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요
고려의 제5대 국왕 묘호는 경종, 시호는 헌화대왕, 휘는 주, 자는 장민,연호는 태평인데 독자적인 연호인지는 논란이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첫번째 군주로 20살에 즉위해 26살 요절한 청년 군주였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정종,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 시키고,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경종은 부왕 광종의 숙청 기간과 사촌동생인 성종의 발전 기간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경종은 무난하게 정치를 펼치며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2. 즉위 이전
아버지 광종의 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광종이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남 효화태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경종의 동복동생이라는 것과 시호만 남아 있어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라고 말하고 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아버지와는 교류가 어려웠고, 철저히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의미한다. 대목황후가 광종이 실시한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대목황후가 자신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를 포함한 호족 세력들의 대변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무래도 이 역시 광종이 모후 혹은 외가의 교육을 받았던 태자 시절의 경종을 경계했던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경종은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경종의 즉위와 치적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은 혼란상 때문에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을 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문제는 왕선이 건의한 법안인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경종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이 법을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들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일명 시정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절의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및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4. 붕어와 유조
붕어 1개월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981년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왕치에게 "나의 뒤를 이으라"는 유조를 남긴 뒤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5. 가족관계
왕후들의 관계가 그야말로 족내혼의 극치를 달린다. 왕후 넷 모두 사촌관계이고 후궁도 사촌관계이며, 왕후 두 명은 자매 사이다. 심지어 제1비인 헌숙왕후를 빼면 부모들이 모두 이복남매 관계이다.
그 덕에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의 증조부모와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후이며, 목종도 족내혼을 하여 처가까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이다.
제1비 헌숙왕후 김씨
고모 낙랑공주와 경순왕 김부의 딸로서 경종과는 고종사촌 지간이다.
제2비 헌의왕후 류씨
숙부인 무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의 딸로서 경조과는 친사촌 지간이다.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제4비인 헌정왕후와 같이 외삼촌이자 숙부인 대종과 선의왕후 류씨
의 딸들로 경종과는 친사촌이자 외사촌 지간이다. 헌애왕후 보다는
천추태후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하며,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은 여인이다. 목종은 성종 이후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보위를 이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시해당하면서 경종의 후사는 끊기게 된다.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경종 재위 시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경종이 승하한 이후, 숙부인 왕욱과 사통하여 사생아를 낳는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남편인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인지 자매지간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남자 문제로 여러가지 물의를 빚었다.
후궁: 대명궁부인 류씨
경종의 고모 흥방궁주와 태조 왕건과 제6비 정덕왕후 류씨 사이에서 태어난 숙부 원장태자(元莊太子)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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